경영사

최등규 회장의 생애

01. 농장주를 꿈꾼 소년

대보그룹 창업주 최등규(崔登奎) 회장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봉당리 원당마을에서
1948년 5월 22일 아버지 故 최창섭(崔昌燮) 옹과 어머니 故 강월기(姜月基) 여사의
5남 2녀,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원당마을을 ‘원댕이’라 불렀다. 소년 등규는 원댕이 마을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30분 남짓 걸리는 주포국민학교와 보령중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집안은 조부 때부터 터를 잡고 땅을 일구며 살았는데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장남 등규는 집안일을 잘 거들었다.
그는 말수가 적고 진중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자상해서 일손을 돕고
어린 동생들에게는 제법 엄한 형 노릇으로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렸다.
생활은 곤궁했지만, 수확을 늘려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등규가 꿈꾼 것은 드넓은 농장이었다.
‘농사만 지을 게 아니라 소와 돼지 같은 가축도 수백 마리 기르는 농장주가 되어야지.’
마음먹었다.

故 최창섭 옹과 故 강월기 여사 젊은 시절 모습.
앞줄 오른쪽 어린이가 최등규 회장

02. 우물 하나 그리고 보리쌀

최등규는 1965년 3월 대천실업고등학교(現 대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한 번씩 견딜 수 없이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학에 가든 농장을 운영하든 돈은 필요했다.
그는 여름방학에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에서 냉차를 팔았다.
뜨거운 모래사장에서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팔았고,
번 돈은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졸업이 가까워져 오면서 그는 초조해졌다.
‘서울에 가서 돈을 벌자.’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끊을 생각을 하며 주포역을 서성였다.
수만 번의 결심과 번복을 거듭하는 사이 졸업식이 다가왔다.
1968년 1월 16일 최등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느 날, 결심을 굳힌 그는 삽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꽁꽁 언 땅은 삽날을 튕겨냈다. 어머니는 늘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갔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그는 우물 만큼은 꼭 직접 파놓고 가기로 했다.
꼬박 한 달이 걸려 우물이 완성되었다.

서울로 가는 아침, 어머니는 아들에게 보리쌀 한 포대를 주었다.
어머니는 길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열차에 올라타서 그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청년 최등규는 ‘내 목장, 내 농장’을 가질 만큼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1960년대 대천실업고등학교 전경

고등학교 졸업 사진

서울로 떠나기 전 어머니를 생각하며 팠던 우물터

03. 1968년 서울, 광화문

1968년 초봄, 청년 최등규는 서울역에 내렸다.
그는 어렵사리 광화문 뒷골목에 셋방을 구했다. 칼잠을 자야 하는 쪽방이었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껌팔이, 신문 배달처럼 하기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그나마도 일을 구하지 못하면 하루 한 끼도 못 먹었다.

하루는 새벽 신문을 돌리는데 걸음이 옮겨지지 않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때 양옥집 대문 앞에 놓여 있는 우유병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우유를 마시고 말았다. 우유 한 병은 평생 미안함으로 남았다.
살면서 이 빚을 어려운 이들에게 평생 갚아야지, 다짐했다.

그는 중국집 배달이나 공사장에서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푼돈을 벌더라도 대학과 관계가 있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자. 변하지 않는 소망은 단 하나, 대학이었다.

반년이 지났을 즈음 기회가 왔다. 종로에 있는 EMI 영어학원에 수위 자리가 났다.
학습 분위기를 흐리는 학생들 군기를 잡는 역할도 해야 했다.
한 번씩 동네 불량배들이 학원 근처에 와서 시비를 걸었다.
계속되는 행패에 더는 봐줄 수 없었다. 그는 죽기 살기로 싸웠다.
깡다구, 절박함이 전해진 것인지 하나, 둘 줄행랑을 쳤다.
그날 이후 놀랍도록 일하기가 편해졌다.

1970년대 종로 EMI 영어학원

04. 독서실 주인, 부동산 재벌, 늦깎이 대학생

최등규는 학원 수위 일을 하면서 유심히 학생들의 동선을 살폈다.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과 독서실을 갔다가 귀가했다.
학부모들은 학습 분위기가 제대로 잡힌 독서실을 원했다. 독서실은 관리 감독을 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다.
마침 원효로 독서실에서 총무실장을 구해 옮기게 되었다.
이미 대형 학원에서 일해 경험이 풍부한 그는 학생들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원효로 독서실이 전보다 좋아졌다는 소문이 돌자 다른 독서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남영동 용산고등학교 인근 대형 독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관리하자 곧 명문 독서실로 탈바꿈했다.

그는 독서실을 직접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향 땅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 건물 2층에 독서실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학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빌린 돈은 5개월 만에 갚았다. 독서실 규모도 키워 한 층에서 5개 층으로 넓혔다.
그래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새로 자리를 알아보았다.
서대문 사거리에 제약 회사 4층 건물을 통째로 빌려 400석 규모의 대형 독서실을 만들었다.
당시 단일 건물로는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서실이었다.

독서실 사업의 성공은 또 다른 사업으로 이어졌다.
발품도 부지런히 판 덕분에 강남 잠실에 아파트가 막 들어설 무렵 아파트와 상가에 투자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입지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그는 삼거리나 사거리 모퉁이 땅만 사들였다.
아파트와 상가를 점점 늘려나갔다. 그렇게 부동산 준재벌로 성장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그는 틈틈이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1970년대 초반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단국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한 그는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주로 교수나 강사들과 더 가깝게 지내면서 인맥을 넓혔다.

1970년대 초반 독서실 풍경

1977년 단국대학교 졸업식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대학 은사가 그를 불렀다.
8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오중렬 선생이었다. 자수성가한 청년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 눈동자가 살아 있었지. 눈에서 광채가 났어.”

최등규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8년 5월 30일 오중렬 전 의원의 4남 3녀 중
차녀 오수아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이듬해에 장남 정훈, 다음 해에 차남 재훈을 얻으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일가를 이룬 최등규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는데 바로 무역업이었다.
그가 만든 회사는 대보인더스트리얼(Daebo Industrial Co., Ltd.), 바로 대보실업이었다.
‘대보’는 고향 대천과 보령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다.
훗날 대보그룹의 모태가 된 대보실업과 같은 이름이었다.

무역대리점, 속칭 ‘오퍼상’에 진출한 그가 선택한 품목은 어린이 이유식 ‘거버’와 수입 과자였다.
제법 돈이 되었으나, 나중에 대기업들이 뛰어들어 재고가 쌓이면서 큰 어려움에 빠졌다.
한편, 그는 스키와 스킨스쿠버 장비를 수입해 판매하는 대리점도 차렸다.
미국, 노르웨이, 오스트리아에서 국내에 수입, 판매한 게 거의 처음이었다.
수입한 장비는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해군에 스킨스쿠버 장비와
관련 물품을 군납까지 하게 되었다.

최등규 사장은 스킨스쿠버를 배운지 6개월 만에 미국에 가서 자격증을 취득했고 스키도 수준급에 올랐다.
그런 후에 영업을 하니 실적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수입 과자 손실까지 만회할 수 있었다.

DACOR와
스킨스쿠버 장비 독점 공급 계약 체결 서신
(1979.12.05)
1980년 취득한 스킨스쿠버 자격증

05. 돌산의 함정

무역업을 지속하기에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대기업이었다.
좋은 상품을 찾아내도 결국 대기업 좋은 일만 시켰다. 사업을 찾아 고심하던 그는
우연히 화강석 수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산은 대대손손 몇백 년을 캐도 계속 돌이 나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건축 마감 재료인 화강석 수출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79년 무렵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위치한 낭산 돌산을 샀다.
1980년 초봄, 허가를 받자마자 화강석 생산 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에 괜찮은 돌이 나왔다.
일본 수출을 하게 되면서 대보실업으로 회사 설립 신고를 했다.
대보그룹이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는 1981년 6월 23일이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나오는 돌 상태가 나빴다.
파쇄해서 철도에나 뿌려야 하는 돌이 나왔다.
자금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데도 성과가 나지 않아 조급해졌다.
나쁜 돌을 거둬내면 옥처럼 좋은 돌이 나올 거란 기대가 사라지지 않았다.
에어 600 콤프레셔로 돌을 녹여 홈을 파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경유가 소요되었다.
거의 한 달에 아파트 한 채 값의 기름을 태우는 격이었다.

현재 익산시 석산 개발 현장

석산 개발 장비

“하루라도 빨리 좋은 돌을 캐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어음을 발행하고
급기야는 은행과 친척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돌을 계속 캐내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더 이상 좋은 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등규 회장

전 재산과 빌린 돈까지 돌산 개발에 투자했지만,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다.
정말 쫄딱 망하고 살던 집도 처분하고 월세방을 얻었다.
어린 두 아들을 본가로, 외가로 각각 보냈다.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니.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인어른은 사위를 나무라지 않고 대신 ‘마아철저(磨我鐵杵)’라는 글을 써주었다.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로 만들 듯 수양하라.’는 뜻이다.
참고 인내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 없이는
‘성공한 삶’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인생의 기둥이 되어준 네 글자, 마아철저

06. 두 가지 약속

크나큰 실패를 맛본 사업가 최등규는 모든 것이 자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 겨우 삼십 대 중반이었다. 주저앉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로 실의에 빠진 그에게 관급공사 하청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이윤이 적어도 돈 떼일 염려가 없고 납기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1983년부터 전문건설 시장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바로 일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렵사리 구한 대보실업의 첫 공사는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청주로 이전하는 공군사관학교 활주로 공사였다.
최등규 사장은 두 가지 원칙을 굳게 다짐했다.

첫째,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일하자.
둘째, 절대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말자.

활주로,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달리는 길. 높이 날기 위한 도약의 순간은 최등규 사장에게도 찾아왔다.
새로운 도전이 활주로 위를 내달렸다.

Episode 01끝까지 책임져 얻은, 열 배의 신뢰

1980년 시작한 ‘대보실업’의 돌산 개발에서는 좌절을 경험했다.
대체로 사업이 망하면 사명을 바꾸는데, ‘대보’ 라는 사명을 그대로 유지했고, 이후 회사가 성장하면서 관공사 현장에 ‘대보건설’이라는 간판을 크게 내걸었다.
이를 보고 돌산 사업 때 미처 받지 못한 돈을 받으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부도나서 지급하지 못했던 화약대금, 유류대금, 장비대금을 10년이 넘었는데 받으러 왔던 것이다.
최등규 회장은 사람들에게 원금의 열 배로 빚을 갚았다. 석산사업에서 실패한 이후 마음 한구석을 계속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후 ‘대보는 결코 돈을 떼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그러다 보니 거래처와도 어려울수록 서로 돕는 신뢰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