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그룹 히스토리 · 1991 - 2000

2부. 종합건설업 진출과 사업 다각화

01. 대보종합건설 설립

대보실업은 1990년 수주 180억 원 돌파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매우 고무되었다.
1991년을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맞이하며, ‘조직관리의 체계 정립’을 경영 슬로건으로 정했다.

최등규 사장은 임직원 모두가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업이념과 경영지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처음 내걸었던 경영이념은 ‘작은 일에도 정성과 혼을 다하자’였다.

이후 ‘정성과 혼을 다해 최고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자’로 경영이념을 수정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원들이 반드시 숙지하고, 실천해야 할 지침도 두 가지로 정했다.

첫째, 지금 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
둘째, 남과 같이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1991년 3월 현장총무회의 자리에서 경영지침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모든 직원이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대보의 정신,
대보인들을 하나로 만들어온 신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건설 사업에서 승부를 가르려면 전문건설사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최등규 사장은 종합건설사 설립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92년 5월 ‘대보종합건설㈜’의 설립 신고를 마치고,
1992년 12월 충청남도 보령시 동대동 820-8에 사무실을 구해 본사로 등록했다.
본사를 지방에 둔 것은 부활한 지방자치제도와 관계가 있었으며,
충청남도를 기반으로 사업을 키워나간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보종합건설 초창기 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

대보종합건설 본사 개소식(1993.02.06)
(영상화면 캡쳐 사진)

Episode 04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

최등규 회장의 현장 경영 원칙은 확고하다. 수시로 건설 현장과 휴게소 등 전국 곳곳을 예고 없이 방문한다.
평소 제대로 일을 하고 있으면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최 회장의 지론이다. 완도 현장 관련 에피소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장에 도착한 것은 6시. 하필 그날이 4월 1일이었다.
“지금 우리 현장에 회장님이 오셨답니다.”
“이 시간에? 오늘 만우절인 거 나도 아네. 서울에서 완도가 옆 동네야?”
최등규 회장의 현장 방문 사실을 대부분의 직원들은 믿지 않았고 만우절 농담으로 웃어 넘겼다. 불과 몇 분 뒤에 회장 방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현재에도 진행형인 대보건설의 현장소장회의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한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는 다른 현장에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보다는 여럿이 함께 의논하고, 답을 구하면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도 한결 수월하지요.”
_최등규 회장

Episode 05IMF 때 직원 더 뽑고 보너스도 줬다고?

대보는 IMF 외환위기 체제 시기에 더 성장하고 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8년 1월에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해 전 직원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실업대란 속에서도 ‘기업은 곧 사람이다’라는 신념으로 1998년 4월 사원모집 광고를 냈다.
국가적 재난 사태로 실직을 겪은 사람들 가운데 인재를 뽑았으며, 대보는 마침내 1998년 매출 1,000억 원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02. 건설 부문의 가파른 성장

1990년대 대보의 건설 부문을 이끈 것은 맏형 대보실업이었다.
영남권 주배관 공사를 비롯해 고속철도와 지하철, 고속도로와 국도, 택지개발사업 등의 현장은 물론,
군부대 관련 공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과 명성을 쌓아갔다.
또한, 발주처와 원도급사로부터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협력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대보실업은 국가 기간산업 시설공사에서도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며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이런 경험과 실적들은 전국구 건설사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퇴계원-의정부간 국도 확·포장공사는
대보실업이 시공한 최초의 터널 공사였다.
첫 고속철도 사업인 경부고속철도 개설공사 4-3공구 노반시설 공사는 난이도가 높았다.
경부고속철도 7-3공구 노반신설 공사에서는 장대터널 시공을 위해
지하터널공법에 선진 보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한편, 대보종합건설이 최초로 수주한 첫 관급 공사는 강경-논산간 도로공사였다.
이를 기점으로 굵직한 공사를 연이어 수주했다. 뒤이어 구리인창지구 택지 공사는 마중물과 같은 사업이었다.
129억 원, 당시로써는 큰 공사금액이었으며 도약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사업이었다.
이후, 최초로 골프장 조성공사 사업에도 참여했다. 훗날 대보그룹의 일원이 되는 서원밸리 조성공사였다.
남산 배수지 건설공사에도 참여해 최초의 수처리시설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경험과 시공 능력을 쌓아나갔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1998년 6월 대보종합건설이 도급순위 200대 건설업체 가운데 달성한 재해율 역대 최저기록이었다.
재해율 0.03%, 우리나라 역대 최저기록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3년 연속 달성이라는 성과까지 거두었다.

대보종합건설 최초 관급공사인 강경-논산간
도로 확·포장공사

03. 유통 부문 진출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971년 1월 추풍령휴게소가 첫 휴게소로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이후 1980년까지 12개소의 휴게소가 추가로 문을 열었다.

정부는 1995년 1월 고속도로 부대시설 운영권 민영화 방침에 따라,
휴게소 56개소와 주유소 27개소의 운영권을 단계적으로 임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단계로 입찰단위를 휴게소 25개 단위, 주유소 14개 단위로 각각 결정했다.

1995년 2월 20일 입찰 마감 결과, 참여기업은 3,826개사로 최종 집계되었다.
평균 경쟁률이 무려 98대 1이었다.
1995년 2월 22일 대보종합건설은 옥산(부산 방향, 이하 방향 생략) 휴게소를 낙찰받았다.
대보그룹의 첫 휴게소이자 유통사업 진출에 디딤돌을 놓은 순간이었다.

대보그룹이 인수한 후 새로운 휴게소로 거듭난
옥산(부산) 휴게소

1998년 인수한 화성(목포) 휴게소

Episode 06대한민국 깨끗한 화장실, 신화의 시작

맨손으로 변기 닦는 최등규 사장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는 불친절과 불결함의 대명사였다.
1995년 어느 날, 대보가 최초로 인수한 옥산휴게소 화장실을 보고 깜짝 놀란 최등규 사장은 직원들에게 청소를 지시했다.
하지만 ‘당연히 더러울 수밖에 없는 공중화장실’에 대한 뿌리 깊은 사회 인식과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청소가 되지 않았다.
최등규 사장은 그 자리에서 맨손으로 변기를 닦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비롯해 공중화장실의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 장면이었다.
깨끗한 휴게소 화장실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대보가 운영하는 옥산휴게소 화장실 거기서 식사 한번 합시다. 밥을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한 화장실은 처음 보았습니다.”
한국도로공사 고위 관계자가 기분 좋은 농담을 할 정도였다.
경북도청, 해병대 본부를 비롯 여기저기에서 ‘화장실 견학’을 왔다.

Episode 07사다리를 찾아라!

1998년 12월 31일. 휴게소 인수팀이 황간휴게소에 찾아갔다. 난방을 위해 창고에는 연탄이 꽤 쌓여 있었다.
“자 확인하셨지요? 연탄 150장입니다. 그만 가시죠.”
인계팀은 목록에 적힌 품목을 모두 확인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재촉했다. 하지만 인수팀은 연탄을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
직접 세어 보고 확인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이 대보유통의 원칙이다. 세상에 뭐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 다들 놀란 눈치였다.
연탄 사건은 대보유통의 전설이 되었다.
이 무렵, 화성휴게소에서는 사다리 소동이 일어났다.
“목록에는 분명히 사다리가 있는데, 실물이 없지 않습니까?”
인수팀, 인계팀 모두 사다리를 찾다가 지쳤다. 한참 뒤 사다리의 행방이 밝혀졌다.
인근 마을에서 휴게소로 출퇴근하는 직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비탈길에 세워두었는데, 시간이 흘러 흙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래도 결국은 사다리를 찾았다. 숟가락, 젓가락 하나도 회사의 재산이라고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대보의 원칙이다.

옥산휴게소는 1995년 대보그룹이 인수하면서 시설뿐 아니라 서비스에서도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휴게소로 거듭났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깨끗한 화장실 만들기, 고객만족 서비스를 적극 실천하면서 1996년 고객만족경영 우수 휴게소로 표창을 받았다.

1998년에는 옥산휴게소에서 상호를 ‘대보유통㈜’로 변경했다.
1998년 11월 25일에는 10개소의 휴게소와 주유소 낙찰에 성공했다.
화성(양방향) 휴게소/주유소, 옥천(서울) 휴게소/주유소, 황간(양방향) 휴게소/주유소 등 총 10개소였다.

대보유통은 새로 운영권을 취득하고 1999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이제 대보는 11개소의 휴게소와 주유소를 운영하는 유통기업으로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다.


04. 서원밸리의 탄생

대보그룹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서원밸리를 인수하면서
레저 분야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1999년 12월 3일 인수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수년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서원밸리 코스는 완공을 마친 상태였다.
인수 후, 대보는 클럽하우스 공사를 재개해 그랜드 오픈을 준비했다.

1999년 4월에 첫 시범 라운딩을 가졌고,
여러 차례 시범 라운딩을 통해 ‘다시 찾고 싶은 골프장’이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로 인원을 구성해 명문 골프장의 면모도 갖추었다.
마침내 서원밸리는 2000년 6월 그랜드 오픈을 했다.
차별화된 시스템을 선보여 서비스 만족도가 높았다.
서원밸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개장 직후 ‘신개념 골프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금세 입소문이 났다.
특히, 골프장 정문에 여직원을 배치하는 마중인사를 통해 세심한 서비스라는 극찬을 받았다.

한편, 서원코스 2번홀은
마스터스의 개최지인 오거스타내셔널CC의 아멘코스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원밸리골프클럽 그랜드 오픈 (2000.06.23)

골프장 최초 자선음악회 ‘그린콘서트’ 개최

Episode 08‘임금님의 사냥터’에 골프장이?

골프장

“파주(坡州)·고양(高陽)·양천(陽川) 등 도성(都城) 사방 1백 리 이내에는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수(禽獸)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_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 1권) 서원밸리는 조선 시대 임금의 사냥터가 있었던
‘서원(瑞原)’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상서롭고 복된 땅’이라는 의미였다.
파주(坡州)의 옛 지명 서원(瑞原)은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서원현으로 처음 불렸으며,
조선 시대(1393년)에는 서원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서원밸리는 금병산 자락에 감싸인 고도 70~170m의 정남향 분지형 코스로 조용함과 아늑함을 선사해주며,
복된 땅이라는 뜻에 걸맞게 많은 홀인원 등 행운이 함께하는 골프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Episode 09그린콘서트 탄생 비화

그린콘서트

서원밸리 개장을 앞둔 어느 날,
마침 점검을 나온 최등규 사장은 잔디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골프장에서 콘서트를 해봅시다. 아이들 놀이터도 만들어주고, 하루라도 아이들이 잔디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합시다.”
직원들은 쉽게 찬성할 수 없었다.
“그날은 자동차도 호강을 좀 합시다. 페어웨이에 주차하면 어떻습니까?”
평일도 아닌 주말 영업을 포기하고, 페어웨이를 주차장으로 내어주겠다니.
직원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골프장 하루 매출과 행사 비용을 합치면 약 5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현실적인 제약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등규 사장은 그린콘서트를 추진했다.
마침내 2000년 10월 14일, 우리나라 골프장 최초로 제1회 그린콘서트가 열렸다.
관객 1,520명이 모인 가운데 콘서트가 열렸으며,
티샷과 퍼팅대회, 프로골퍼의 원포인트 레슨, 추첨을 통한 경품 행사 등이 이어졌다.
이후 아름다운 봄 풍경과 함께하고 저녁시간 쾌적하게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도록
5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되고 있다